제주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수산리

2020. 12. 13. 10:32어쩌다 얻어걸린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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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좀 여유롭게 집에 있으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청년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뭐하십니까?"

"그냥 있지?"

"그럼 퐁낭 세 개 있는 귤창고로 나옵서"

"아니, 왜요?"

"귤창고에 오늘 시인분들이 오셔서 글을 쓰시는데, 

와서 보세요"

"지금?"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빨도 안 닦고 게으름 피우다

그제야 이빨을 닦고 옷을 주섬주섬 입는데,

또 전화가 온다.

 

"형님, 빨리 나오세요"

"응 지금 나가요"

"지금 형님 집 앞에 있어요"

"아니 걸어서 1분도 안 걸리는데..."

"집 앞에 있으니까 바로 나오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으면서

재킷을 입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급하게 나가보니, 

청년회장님의 트럭이 집 앞에서 대기 중이다.

 

그리고 그 뒤를 보니, 

"헉!"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차 4대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당황돼서 청년회장님께 

"창고에서 시 쓰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물으니,

"점심부터 먹고 하려고요~"

 

그때 시각이 11시 50분쯤이었던 것 같은데,

여하튼 그렇게 납치되듯 식당으로 끌려가서 

일단 간단하게 막걸리와 백반으로 점심을 때우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오늘 귤창고에 시를 써 주실 시인분들과

음악가 분들이 함께 자리하고 계셨다. 

 

처음 뵙는 분들과 식사는 항상 어려운데, 

게다가 나와는 거리가 먼 예술문화인 분들이라니...

 

그래도 편하게 식사를 잘 마치고, 

바로 수산 윗동네 귤 창고로 이동을 했다.

 

귤창고 앞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시인분들께서 페인트와 붓을 들고,

사다리에 오르셔서 

당신들이 제주2공항과 연상되는 시들을 쓰기 시작하신다.

 

연세가 있으시고, 

오늘 날씨가 바람까지 많이 부는 날씨여서

사다리에 오르신 시인분들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으나,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글을 쓰셨다. 

 

귤창고에 도착하자 마자 작업 분담을 하시고...
바람이 많이 불고 해서 작업하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도 다들 열심히 작업에 임해 주셨다

 

시인분들이 글을 쓰시는 동안 음악인들께서 노래로 흥을 돋우어 주셨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정도 

벽서 작업이 끝나갔다.

 

쓰신 글들을 따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릴 적 내가 뛰놀던 흙냄새 나는 곳

이제는 모두 사라져 변해 버렸어

뒷동산 아지랑이 어디로 떠났나

우리 이젠 생각해요 아름다운 풍경들

아! 가야지! 돌아가야지!!

사랑해요 사랑해야 해요 이 모든것들을.'

-성산 수산이 낳은 제주어가수 양정원의 노래-

 

 

'민간의 탈을 쓰고 들어오는 

이 군사기지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강정을 이야기하고

다시 4.3을 말할 것이다.

성산읍에 자존의 울타리치고

한라영산, 

그 신성을 지킬 것이다!

-김경훈의 시 '멈춰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

후손 대대로 물려줘사주

무신거? 공항?

미깡밭 놈삐밭은 어떵허고?

이거보라

땅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여

다 죄 짓는 일이라

당장 설러불렌 허라!' 

-김수열 '수산할망 가라사대-

 

 

'고영이

버실당

넹게줘살

땅!'

-더콰니-

 

 

'이땅엔

고봉밥 같은

아침 햇쌀과 

마을 골목골목을 가득 

채우는 조상 대대의 

부지런한 발자국소리 

외에 그 어떤

탐욕의 소음도

들려와선 안 된다'

-이종형-

 

 

이렇게 멋진 다섯 개의 시가 귤창고를 

가득 채웠다.

 

그러고 나서 바로 즉석 노래공연이 있었다.

시가 적힌 귤창고가 무대가 되었고,

우리는 바로 관객이 되었다. 

 

두 곡의 노래를 해 주셨는데,

노래는 좋았지만, 

너무 슬프고 아련하게 들렸다. 

 

영상으로 담았으나, 바람소리가 너무 커서 

이 노래를 함께 들려드리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시가 적힌 귤창고가 무대가 되어 노래를 불러주시는 음악가분들

 

이렇게 윗동네 작업이 끝나고 

바로 알동네로 이동을 했다.

 

이 곳에서는 우리의 청년회장도 함께 

글을 써 주었다. 

 

노란 바탕의 벽과 파란 지붕을 가진

알동네 귤창고에는 다음 같은 글이 적혔다.

 

 

'성산의 하늘엔

비행기보다 새들의 비상이 

더 성산답다

 

수산의 하늘엔

비행기 소음보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름답다'

- 김수열 '수산의 하늘'-

 

 

'둥글거나 모나거나 차별 없이 쓸모 있게

어깨를 빌려주고 숨구멍 나눈

토종혈통 섬것들

뼈와 지문들'

- 홍경희 '제주밭담'-

 

 

'수산으로 가는 길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길

뜨거운 바람으로 파괴의 굉음을 이겨내는 길

고향을 버리고 갈 곳이 없다는 펼침막이

제2공항 물러가라는 몸짓이

자기 자리에서 꼿꼿이 나부끼고 있다.'

-김규중- 

 

멋지게 글을 쓰시고 계시는 청년회장님~

 

이렇게 오늘의 일과는 마무리되었다.

추운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주 제2공항으로부터 

수산리와 제주의 자연을 위해 

나서주신 제주의 문인들과 음악인들분께

너무 감사할 뿐이다.

 

이름을 제대로 여쭙지 못해

뭉뜽그려서 문인들과 음악인들이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활동들이 

제주2공항과 관련없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강정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애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다.  

 

더 이상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마음 깊이 바라고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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